
우리 나라의 인터넷 인구는 2000년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유료가입자만 1,680만 명에 달한다. 이 중 인터넷 중독이 의심되는 사람은 엄격한 중독의 기준에 부합되는 사람이 3~4%, 중독경향이 있는 사람이 20~30%로 추정된다. 방송에서 보듯이 아이들은 자주 PC방에서 죽어 나가고, 가정주부는 채팅으로 바람이 나 집안이 망가지고, 젊은이는 번개팅으로 몸과 마음을 버리고 있다.
인터넷 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면서 많은 학자들과 정부가 그 대책을 찾기에 부심하고 있다. 나도 또한 도대체 인터넷 중독이 무엇인지 연구해 보기로 하고, 뒤늦게 스타크레프트나 버디버디를 해보기도 했다. 잠시 인터넷을 해본 내 경험은 ‘거 참 재미있다.
인터넷 중독분야의 대가인 Young 박사는 인터넷 자체에 중독에 빠지기 쉬운 요소들이 있으며, 그 요소는 익명성, 편리성, 탈출성이라 하였다. 익명성이란 인터넷상에서는 나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욕구, 감정을 드러내기 쉽고, 되고 싶었던 이상적 자기로 쉽게 변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편리성이란 접속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밤낮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접속할 수 있는 신속성을 말하며, 탈출성은 일상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참을 필요도 없고, 망설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최근 내가 속한 연구팀이 인터넷 중독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인터넷 중독에 빠지기 전에 ‘인터넷을 통한 보상경험’을 한다. ‘인터넷을 통한 보상경험’이란 인터넷 채팅, 게임, 사이버 섹스 등을 통해 현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고통을 잠시 잊었던 경험, 현실에서 친구가 없던 사람이 가상세계에서 친구를 사귄 경험,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모습으로 변해본 경험, 인터넷에서 마음껏 분노를 표현해 본 경험 등 인터넷을 통해 주관적으로 만족하거나 불편을 해소한 경험을 말한다.
둘째, ‘인터넷을 통한 보상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평소 감정이 우울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고, 스트레스는 많지만 대처할 능력이 없고, 자기조절을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시 말해서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모두가 인터넷 중독에 걸리는 것은 아니며, 현실생활에서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처하거나,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대신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보상받거나 현실문제를 잊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첨단화되어도 결국 본질은 감정문제, 자기조절 문제로 돌아온다. 나는 인터넷 중독 연구를 하면서 심리학자인 James Olds와 Peter Milner의 ‘자기-자극’ 실험을 떠올리곤 한다. 쥐를 가지고 실험하던 그들은 실수로 원래 의도하지 않던 뇌의 부위에 전극을 잘못 꽂았는데, 그곳은 쾌를 가져다주는 뇌 영역이었다. 쥐들은 스스로에게 쾌락을 주기 위해서 먹는 것도 잊은 채 한시간에 무려 2,000번이나 스스로 bar를 누르다 소진하여 죽었다. 그 뒤 원숭이를 가지고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로 bar를 시간당 8,000번을 눌렀다.
중독이 된 사람들의 행동은 어느 면에서 이와 비슷하다. 학교를 마치자 말자 집으로 뛰어와 옷도 벗지 않은 채 인터넷에 빠진다. 부모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부모도 안중에 없다고 한다. 그 달콤한 잠까지도 쫓아가며 몇 일 밤을 컴퓨터 앞에서 뜬눈으로 새는 사람은 또 어떤가! 생면부지인 사람과의 채팅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은 또 어떤가! 노이로제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노이로제를 보지 못하는 법이다. 한낱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데, 전자회로의 장난질에 불과한데, 그 속에서 흥분하고 목숨을 걸고, 죽고 살고 하니 말이다.
인터넷 중독의 핵심은 이렇듯 실제의 현실을 잊어버리고, 브라운관에 비친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는데 있다. 이러한 착각의 배경에는 현재의 자기를 잊어버린 것, 자기 마음을 놓친 것에 있다. 물론 인터넷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대부분 슬픔, 고통, 좌절로부터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인생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고통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현실에 자기를 맞추기도, 현실을 변화시키기도 어렵게 된다.
좀 더 적극적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고, 고통을 경험했기에 행복도 알고, 실패를 해보았기에 성공의 기쁨을 아는 것이 아닐까. 행-불행은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통이니, 불행을 맛보지 않으면 어찌 행복의 맛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전통은 中庸을 중시하고, 克己復禮하는 것이다. 서구는 르네상스와 Freud 이후 인간의 욕구를 발산하는 쪽으로만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물론 Freud는 욕구발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러한 서구 문화를 우리 것과 제대로 대조해 보지 않고 무분별하게 들여오거나, 외국의 것이면 다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현재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인터넷 중독,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사용, 소위 ‘명품’ 바람은 내면의 수양을 중요시하던 우리의 전통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상담자로서 볼 때 채울 수 없는 욕심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며, 참 평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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